생애 및 업적

조선 초기의 명재상이자 무장, 김종서 장군의 생애와 위대한 업적

김종서 장군 초상화

김종서 金宗瑞

절재(節齋)

1383년 (고려 우왕 9년) - 1453년 (단종 원년 계유정란)

문무겸전의 명재상

출생과 관직 생활

고려 우왕 9년(1393년) 충청도 공주 요당 월곡리에서 삼군 도총제 김수와 성주배씨의 차남으로 태어남.

본관은 순천, 호는 절재, 자는 국경, 시호는 충익공, 벼슬은 좌의정 이름은 김종서임.

조선 태종 5년(1405년) 응류 대과에 급제한 문신.

태종 15년 상서원 직장, 죽산현감, 병조좌랑을 지냈고, 세종때 사헌부 집의, 승정원 좌우승지, 이조 우참판, 함길도관찰사, 형조와 예조판서, 우의정을 역임함.

문종과 단종때 좌의정에 오른 조선 초기에 문무를 겸전하고 뛰어난 인품과 학문, 그릭 청사에 빛나는 업적을 고루 갖춘 인물로 평가됨.

위대한 업적

감찰사 시절 강원, 충청, 평안도의 굶주린 백성 구휼로 경세제민의 정치 구현.

6진 개척

1433년 한길도관찰사로서 그 지역에 할거하던 여진족을 토벌, 두만강 유역에 6진을 설치, 지금의 압록 두만강 까지 영토를 확장함.

제승방략 저술과 북방정책 수립

육진개척변비책과 제승방략을 저술, 확고한 한반도 북방정책에 반영. 제승방략에서는 군사의 인사, 정보, 작전, 동원 등을 망라하였으며 한 군현에 외적 침입 시 이웃 군현 병사의 즉각적 동원을 통한 국란극복 정책을 적용, 이는 조선 후기 까지 전달 운영되었음.

호기가(豪氣歌)와 인각화상(麟閣畵像)의 시조

국경 성곽에 긴 칼 짚고 서서 지으신 《호기가》는 장군의 호방한 기백과 의지를 잘 나타낸 대표적인 시조.

삭풍은 나무 끝에 불고

명월은 눈 속에 찬데

만리변성에 일장검 짚고 서서

긴 파람 큰 한소리에

거칠 것이 없어라

- 절재 김종서

장백산에 기를 꽂고

두만강에 말을 씻겨

썩은 저 선비야 우리 아니 사나이냐

어떻다 인각화상을

누가 먼저 하리오

- 절재 김종서

이 시조 두편은 단순한 문학작품을 넘어 강렬한 애국심과 충성심을 나타내는 시문으로 절재 선생의 웅장한 기상과 불굴의 정신을 상징합니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 쳔찬

조선 초기 세종의 명으로 4년에 걸쳐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를 편찬. 지금까지 고려정사로 전승되고 있음.

신원 복권과 재조명

영조 22년

장군은 사후 293년이 지난 영조 22년(1746)에 이르러 신원 복관의 교지를 받고 복권되었으며, 시호를 충익이라 하였고 영조임금이 몸소 제문을 지어 선생의 묘소에 치제하니 충의대절의 상징으로 재조명되었다.

정조, 순조 시대

정조때는 부조전을 내리고 순조 때에는 장군의 장남 김승규의 충효에 대한 정려문인 국가의 은전을 하사하셨다.